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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약재공의 조부모 묘갈명과 묘표 탐구2

작성자
류재균
작성일
2022.06.17
첨부파일1
추천수
2
조회수
171
내용

약재공의 조부모 묘갈명과 묘표 탐구2

1. 약재공의 큰할머니 묘표(墓表)

정경부인 나주나씨 묘비

(첨부파일 참조)

단기 4305(1972) 12세손 근영 세우다.

 

증 정경부인 나주나씨 묘표

貞敬夫人 潘南朴氏墓表

정경부인 반남박씨묘표

 

嗚呼此故貞敬夫人 羅州朴氏之墓也 曾祖 諱兆年正郎 贈左贊成 祖諱緝

(오호차고정경부인 나주박씨지묘야 증조 휘조년정랑 증좌찬성 조휘집)

贈叅判 考諱應寅都正 妣密陽卞氏察訪希訥之女夫人旣荓歸于佐郞

(증참판 고휘응인도정 비밀양변씨찰방희눌지녀부인기병귀우좌낭)

贈吏曹叅判 文化柳公諱洬 性莊嚴家人未嘗見啓齒晨起必令婢僕

(증이조참판 문화류공휘속 성장엄가인미상견계치신기필령비복)

灑掃室庭否則終日不言未幾以某十二月二十一日疾沒于城南居第無子

(쇄소실정부칙종일불언미기이모십이월이십일일질몰우성남거제무자)

葬于楊州東面金谷里某向之原盖就都正公所生母貞敬夫人洪氏別葬之地

(장우양주동면금곡리모향지원개취도정공소생모정경부인홍씨별장지지)

其位在後左百餘步云叅判公後以從子佐郞 贈左贊成諱誠吾爲子及卒葬于

(기위재후좌백여보운참판공후이종자좌랑 증좌찬성휘성오위자급졸장우)

羅州松林山先兆夫人竟以歲久地遠不克從祔焉叅贊公又娶羅州朴氏

(나주송림산선조부인경이세구지원불극종부언참찬공우취나주박씨)

卽夫人從兄弟錦溪君諱東亮之女生二男二女男長尙運戶曺判書次尙載待敎

(즉부인종형제금계군휘동량지녀생이남이녀남장상운호조판서차상재대교)

女適申暹別坐李徵善孫男奉鳳瑞鳳輝俱進士鳳逸鳳岳鳳采女李世蕞

(녀적신섬별좌이징선손남봉봉서봉휘구진사봉일봉악봉채녀이세최)

申濟爲判書出鳳庭鳳齡女韓重赫李益壽爲待敎出曾孫男女若干人判書公

(신제위판서출봉정봉령녀한중혁이익수위대교출증손남녀약간인판서공)

謹追先志將立表于墓左以圓永久謂余錦溪孫俾記其陰鳴夫人之沒幾至

(근추선지장입표우묘좌이원영구위여금계손비기기음명부인지몰기지)

百年生卒德懿皆無得以祥考嘗竊聞之先王考素哀夫人早世又與叅判公友

(백년생졸덕의개무득이상고상절문지선왕고소애부인조세우여참판공우)

誼甚篤俟其喪畢乃以女繼歸于叅贊公然則今判書公兄弟子姓之蕃衍殆由

(의심독사기상필내이녀계귀우참찬공연칙금판서공형제자성지번연태유)

夫人而致之亦可見天道人事相感有如此者柳氏之福盖未艾也嗚呼其異矣夫

(부인이치지역가견천도인사상감유여차자류씨지복개미애야오호기이의부)

-右議政朴世采撰-

-우의정박세채판-

한자 줄 바뀐 것은 원문에서 띄어쓰기나 줄바꿈이 아니며 컴퓨터 화면으로 보기좋게 하기 위함이며 족보에 한글 번역에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으나 족보 그대로 번역글을 다음에 씁니다.

 

오호라 이곳은 정경부인 나주박씨의 묘이다.

부인의 증조는 휘조년이니 정랑으로 증좌찬성이요, 조는 휘집이니 증참판이요 고는 휘 응인이니 도정이요 비는 밀양변씨니 찰방 희눌의 따님이다.

부인이 기병(旣荓)하여 좌랑 증이조참판 문화류공 휘 속에게 출가하였다.

성품이 장엄하여 가인(家人)에게 일찍 치아를 열어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반드시 비복(婢僕)으로 실내청소를 명령하되 행하지 않으면 종일 말을 하지 않더니 얼마후 모년 1221일에 지병으로 성남 사제(私第)에서 종하니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양주 동면 금곡리 모향원(某向原)에 장사하니 대게 도정공의 소생 모() 정경부인 홍씨의 별장(別葬)한 자리에서 그 위치가 후좌 100여보()에 있다고 이른다.

참판공이후에 종자 좌랑 증좌참찬 휘 성오로 아들을 삼았더니 돌아가심에 이르러 나주 송산산에 장사했는데 부인은 마침 세월이 오래되고 거리가 멀어서 능히 따라 합부(合祔)하지 못하였다.

참찬공이 또 나주박씨를 취()하니 즉 부인의 종형제 금계군 휘 동량1)의 따님이다. 22녀를생하니 남에 장은 상운이니 호조판서요, 차는 상재니 대교요, 여는 신섬 별좌이징선에게 출가하였다.

손에 남은 진사 봉서와 진사 봉휘와 봉일과 봉악과 봉채요, 이세최와 싲제의 부인은 판서의 소생이요, 봉정과 봉령과 한중혁과 이익수의 부인은 대교의 소생이다. 증손의 남녀는 약간인이다.

판서공의 선지(先志)를 따라 장차 묘좌에 표석을 세워서 영구를 도모하려고 금계의 손이 된다고 말하여 비의 음기(陰記)를 요청하였다.

오호라 부인의 졸함이 백년 가까이 되어 생졸과 덕의를 자상히 살필 수 없다. 일찍 들으니 나의 선왕고(先王考)께서 부인의 일찍 돌아감을 슬피 여기소 또한 참판공으로 더불어 우의가 심히 두터워 탈상함을 기다려 딸을 참판공에게 계배로 출가시키셨다. 그러니 판서공의 형제의 자손이 번창함은 자뭇 부인으로 연유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는지라. 아아 그 특히힘이여!

-우의정 박세채 지음-

참고 문헌 : 문화류씨세보 총목(무자보) 581.

정경부인 나주박씨묘표를 하정공파보에 등재하지 않은 것은 귀중한 자료 누락으로 다음 파보 편찬 때는 추가 등재를 기원합니다.

 

2. 찬성공 묘갈문과 나주박씨 묘표에 등장하는 인물

찬성공 묘역 :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서당동 先塋局內 白虎下麓

(첨부파일참조)

묘비에 써진 인물

반남박씨 = 나주박씨

본관은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潘南面)이다. 시조는 고려시대 인물 박응주(朴應珠)입니다.

조선 개국 공신 평도공 박은(朴訔), 또한 조선조 최고 영예인 문묘 종사 및 종묘배향공신(숙종)인 소론의 영수 박세채2)를 배출하면서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 종묘배향공신(고종)이자 개화파의 아버지인 우의정 박규수도 배출했습니다.

반남박씨 묘표(墓表)를 지으신 박세채는 (당시는 우의정) 본관은 반남(潘南)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박의(朴猗)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증조부 박응복(朴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박동량(朴東亮)은 형조판서를 지냈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동량은 박조년(朴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박소(朴紹)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박응복(朴應福)이며,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4를 표로 만들어 이해를 쉽게함, 휘존칭생략)

(첨부파일 참조)

나주박씨가 졸하자 휘속할아버지께서 후손이 없어 훗날 제사를 염려되고 묘의 분실을 우려하여 친정 선영에 모셨는데 후속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주 송림산에 모시려고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고 거리가 멀어 합부하지 못한다는 묘표입니다. 고양공 종중 민성 아버지()께서 나주박씨 묘를 찾아 시흥 부제학공묘하에 모셨다가 고양공종중 민성회장께서 영암 모산 송산원에 합부하여 모시게 됩니다.

贊成公諱洬墓碣文이나 정경부인 나주박씨묘표 당시 약재공은 호조판서이었고 비문에 이름이 없는 자녀 중에 상여 상만 조시립과 손중에 봉협(봉악?) 봉채 봉덕은 출생하지 않았거나 혼인하지 않았을 경우입니다.

나주박씨묘표 복원과 松林原 안내석을 기원해 봅니다.

약재공과 아버지의 묘역에는 안내석이 있는데 할아버지 묘역에 신도비 대신에 안내석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며 모산 서당동에 약재글씨와 좌의정 박세채가 지은 묘비가 있다는 것은 큰 자산인데 큰 자산을 알리는 방법은 안내석()입니다.

1 : 선조첫번째 왕후 의인왕후의 사촌동생 박동만의 직계후손입니다. 좌의정 박동량의 3녀가 휘 속 아들 휘성오에게 출가합니다.

2 : 박세채의 고모가 나주박씨이며 휘 류속은 고모부입니다. 증조부 박응복(朴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박동량(朴東亮)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과 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당내간의 친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은 그의 사위입니다. 박세채의 많은 저술 가운데 예학에 관한 저술은 매우 큰 업적을 남겨 예학의 대가라고 칭합니다. 약재공아버지 (휘성오) 행장을 지으()셨습니다.

 

3. 찬성공과 나주박씨 묘비의 참고 자료

찬성공과 나주박씨 묘표와 족보에 자주 나오는 즉 찬성공 묘갈문에 二十五年歿與公同, 나주박씨묘표에 松林山先兆夫人竟以歲久地, 하정공파보 1106쪽에 諱 用恭 나주의 원정면 서당동(書堂洞) 松林山壬坐에 안장했다. 숙종 병술에 松山에 모시고 祭祀하니의 표기와 정경부인벅씨묘표에서 先志將立表于墓左以에서 원 한자가 原 遠 院 圓으로 혼돈하여 쓴 것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동산원) (집원)의 다른 점

하정파보 1144

諱 浚 靈巖郡 淸風院 : 낭주최씨가 살던 마을 이름

사도세자 묘 : 현륭원(顯隆園)정조13(1789)장조로 추존된 1899년 융릉(隆陵)으로 승격

족보의 묘지 표기 방법

() - 임금이나 왕후의 무덤.

() - 왕세자, 왕세자빈, 왕의 부모의 무덤.

() - 흙을 쌓아 장식한 무덤. 귀족들은 분()에 시신을 묻었다.

() - 분과 달리 나무를 심지 않고 흙을 쌓지 않은 무덤(국립묘지).

() - 옛 무덤 중 주인을 알 수 없는 큰무덤. 천마총, 무용총.

옛날(고려 이전)에 서민이 죽으면 시신에 옷을 입혀 풀숲에 그냥 두는 조장(鳥葬) 하거나 하천에 묻어 홍수가 나면 유실되게 했다.

조선시대 능원제도(陵園制度)에 따라 선조아버지 덕흥군묘는 비문은 덕흥대원군하동부대부인정씨지묘(德興大院君河東府大夫人鄭氏之墓)”라고 되어 있어 왕은 릉()이라했으나 왕후의 친정부모를 이라 하면서 원 분 묘의 구별이 없어지고 봉분 앞에 상석(床石)유무, 그 앞에 장대석으로 계절(階節: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을 쌓는 넓이, 정면에 석등, 좌우로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유무, 묘비의 규모,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의 유무, 위패를 모신 사당(祠堂)유무로 능원제도가 변질되었습니다.

4. 찬성공과 나주박씨 묘비와 교관공묘역

(첨부파일 참조)

위는 찬성공 묘 아래는 교관공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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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약재공종중 홈페이지가 네이버나 다음처럼 +사진++사진+을 올리는데 어려움이 있어 이글에서 (첨부파일 참조)은 사진자료입니다.

문화류씨 대종회 홈페이지도 본홈처럼 글쓰기가 안되어 첨부파일이나 링크주소를 올립니다.

사진이 첨부된 글을 보시려면 첨부파일을 보시든지 아래 사이트 주소를 클릭하여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https://cafe.daum.net/moonwharyu/Ggpo/188?svc=cafe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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