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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류씨 의견과 다른 전주류씨 연혁

작성자
반포
작성일
2013.02.16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3145
내용

저는 전주류씨 23세 류기송 입니다. 본 홈페이지에서 전주류씨에 관한 기록을 보니 저희 전주류씨 대동보의 내용과 달라 제가 알고 있는 전주류씨 연혁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전주류씨 시조 상계(上系)에 대한 것을 수록할 경우는 전주류씨 측과 협의를 하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전주류씨 연혁

문헌상으로 전주류씨(全州柳氏)는 백제 무왕 때 일본으로 건너간 류중광(柳重光)이란 인물이 있어 신라 말, 고려 초에 창성(創姓)된 문화 류씨보다 오랜 역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立證)하고 있다.

또한 신라 말의 전주류씨로서 각간(角干)을 한 류기휴(柳其休)의 기록이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한 류방헌(柳邦憲)의 묘지명에 나는데 현재는 시조의 선대를 알 수 없는, 시조가 다른 전주류씨 류혼(柳渾), 류습(柳濕), 류지(柳池)의 3파가 있다.

백제 때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기 위하여 감독관으로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류중광(柳重光)은 본관이 전주(全州)로서 요메이(用明) 천황(天皇)으로부터 금강(金剛)이란 성(姓)을 하사받아 금강중광(金剛重光)으로 불린다.

그는 일본 최초의 사찰(寺刹)인 사천왕사를 완공한 후에 성덕태자가 사천왕사의 유지와 보수 공사를 계속 맡아 줄 것을 요청하여 금강중광[류중광]과 그 자손들은 지금까지 1400년이 넘게 사천왕사 옆에 살면서 사천왕사를 돌보고 있다.

신라말기와 고려시대의 전주류씨는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시대의 묘지명(墓誌銘)에 나타나며, 특히 고려 때 평장사를 한“류방헌묘지명”에는 증조부가“각간 류기휴”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요한 인물로는 신라말 각간(角干) 류기휴(柳其休), 백제 우장군 류법반(柳法攀), 고려 평장사 정간공(貞簡公) 류방헌(柳邦憲), 상사봉어(尙舍奉御) 류주탁(柳周鐸), 스님 류창운(柳昶雲), 증참지정사(贈參知政事) 충신공(忠愼公) 류 신(柳 伸), 평장사(平章事) 대숙공(戴肅公) 류광식(柳光植), 평장사(平章事) 장정공(莊定公) 류 소(柳 韶),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류능(柳能) 등이 있다. 그러나 전주류씨는 류능 이후부터 계대가 단절되었는데 이때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류능은 무신(武臣) 최항(崔沆)이 죽기 전에 최의(崔竩)를 잘 보살펴줄 것을 부탁한 인물로서 실권자 최의와 함께 권력을 누리다가 최의가 문화인(文化人) 대사성(大司成) 류경(柳璥)과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 등에 의하여 주살(誅殺)될 때 함께 참살 당하였는데 그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약 2세대(世代)가 지난 후에 시조를 달리하는 혼(渾), 습(濕), 지(池)의 전주류씨 3파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류씨측에서 전주류씨 시조라고 하는 전성군(全城君) 류양재(柳良梓)의 당숙(堂叔) 류경(柳璥)은 고려 고종 임금이 류경의 집에서 붕어(崩御)할 정도의 권세가였으므로 류양재는 당숙과 함께 권세를 누렸을 터인데 류양재의 후손이 실전(失傳)되다가 2세대(世代) 후에 나타났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토성(土姓) 전주류씨인 류능(柳能)의 가문이 몰락하자 류능 또는 그의 삼촌 류유(柳蕤)의 자손이 전주지방으로 낙향(落鄕), 자취를 감추어 계대가 끊어졌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특히 류능(柳能)의 부친 류소(柳韶)는“근심과 화병(火病)으로 별세하였다”하고 또 사람들이 말하기를“살아서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죽어서도 이로운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류능의 가족은 죽이지 않은 것이다.

또한 습(濕)을 시조로 하는 전주류씨 임진보에는 시조 습의 상대(上代)를 방직(邦直)과 운(橒)이라 하였으니 이를 유추(類推)해 본다면, 류기휴(柳基休)를 비조(鼻祖)로 하고, 두 분을 14세 류능의 자(子)와 손(孫)으로 하면 두 대(代)가 실전(失傳)하지 않고 시조 습(濕)까지의 계대가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전주류씨 족보를 보면 창간보 임진보를 보면 시조(始祖) 우측에 방직(邦直)과 운(橒)을 별도로 기록하고 “문화류씨 차달의 후손인데 계대를 실전(失傳)여 이와 같이 기록하니 참고하기 바란다”고 하였지 시조 상계(上系)가 문화류씨 류양재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조2(1726)년 두 번째로 발간된 구병오보(舊丙午譜)에서는 이를 삭제하였고, 고종13(1876년)에 네 번째로 발간한 "병자보(丙子譜)"에는 방직(邦直), 운(橒) 두 윗대의 기록은 믿을 바가 못 된다고 이를 고증하여 최초 족보인 임진보의 "문화류씨분관설(文化柳氏 分貫說)"을 반박하는 류병문(柳炳文) 선조님의 "전주류씨보계변증(全州柳氏 譜系辨證"을 수록하였다.

그런데 재정(財政) 문제로 발간이 중단된 1924년의 갑자보(甲子譜) 편집에 참여한 류벽(柳碧) 선조님은 류남규(柳南珪) 선조님이 병자보에 수록한 변증문에 대하여 반론(反論)을 제기하는 반증문(反證文)을 갑자보에 수록하여 문화류씨분관설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2004년에 전주류씨 대종중에서 발간한 계미보(癸未譜)에서는 이러한 문화분관설과 토성설 모두 시조 선대의 계대를 이을 수 없으므로 앞으로 시조 선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명종17(1562)년에 발간한 문화류씨 최초 족보인 가정보(嘉靖譜)를 보면 시조 대승공 류차달의 9세손 순(淳)의 아들은 5명으로 큰아들 한운(旱雲)은 무후(无后)이고, 둘째는 성비(成庇), 셋째는 자성(資成), 넷째는 양재(良梓), 다섯째는 인비(仁庇)이다.

그런데 숙종12(1688)년에 발간한 족보에는 순(淳)의 아들이 6명으로 1명이 늘어 넷째가 성간(成澗)이 되었다. 철종1(1850)년에 발간한 족보에는 아들이 또 1명이 늘어 성간(成澗) 다음에 원비(元庇)를 추가하고 큰 아들 한운(旱雲)은 삭제를 하였는데 2008년 족보에는 한운을 다시 큰아들로 추가하여 순의 아들을 7명으로 하였다.

1565년 문화류씨 가정보에서 9세 순(淳)의 넷째 아들 양재(良梓) 하단(下段)에는 아무런 주기(注記)가 없고, 풍산파와 진주파의 선조라는 자성(資成)과 인비(仁庇)도 하단에 분관(分貫)된 기록이 없으며, 또한 1688년 무진보(戊辰譜)에도 양재는 무후(无后)이다.

철종1(1850)년에 간행한 문화류씨세보에는 류양재(柳良梓) 위에 문화분관(文化分貫)을 뜻하는“全州(전주)”와 좌측에는“全城君後孫永慶領相(전성군후손 영경 영상)”이라 가필(加筆)하였다.

그런데 2008년 문화류씨대종회에서 발간한 문화류씨세보의 전성군(全城君) 류양재(柳良梓)의 기록에는 습(濕)을 시조로 하는 전주류씨의 임진보(1652)에 수록된 내용을 그대로 기술하고 큰아들을 제도도부승 방직(邦直), 둘째아들을 정간공(貞簡公) 방헌(邦憲)이라 하였다.

류방헌의 주기(註記)에는 高麗惠宗甲辰生穆宗朝禮部侍郞己酉卒(고려혜종갑진생목종조예부시랑기유졸)이라 하였다. 즉, 류방헌은 “고려 혜종1(944)에 태어나 목종 때 예부시랑을 하고 목종12 (1009)년에 별세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1009년에 별세하였다고 주기(註記)를 한 류방헌을 1250년 전후 사람인 류양재의 둘째아들로 한 것은 누가 보아도 문화류씨대종회측에서 큰 실수(失手)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全州柳氏 柳濕派 23世 柳基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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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이문제에대하여는 전주류씨대종회의 의견이 매우중요하고 존중되는것이 순리라고 생각되며

    11 년전
  • 관리자

    문서고증은 별개의문제로 서로 토론하고 조사한것을 발표하는것이

    11 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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