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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류씨 족보와 성씨 이야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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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370
내용
문화류씨 족보와 성씨 이야기


1. 문화류씨 족보

한국 최초의 족보는 1423년(세종 5년)에 편찬된 문화류씨(文化柳氏) 영락보(永樂譜)인데, 아쉽게도 현재 서문만 남아있다. 그 후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 1477년 성종 7년; 3권, 364 페이지)와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 1562년 명종 17년; 10권 2204 페이지)가 나왔는데 현존한다. 이 두 족보는 내외손(內外孫)을 차별 없이 동격(同格)으로 취급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사위의 경우 성명만 쓰고 본관이나 선조의 기록은 일체 쓰지 않은 반면 그 자손(외손 및 외외손)은 6-7대까지 자세히 적고 있어 핏줄을 중시하고 있다. 가정보의 경우 4만 2천명이 등재되어 있다고 하는데, 양자기록이 나오고 서자(庶子)의 기록은 없으며, 개가한 여자의 남편을 전부(前夫)와 후부(後夫)로 기록하고 있으며, 기록의 정확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성종에서 중종에 이르기까지 75년간 나라에서 89회의 문과(文科) 과거가 실시되어 1595명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중 1120명의 이름이 가정보에 올라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거의 대부분인 1071명이 문화류씨와 혼인관계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전체 급제자의 약 70%를 차지하는 놀라운 수치이다.

가정보 이후 여러 차례의 족보 간행이 있었다.


2. 문화류씨의 시조

문화류씨의 가장 윗 조상으로서 기록에 나타난 이가 바로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는 류차달(柳車達)이다. 고려사 열전(列傳)에 고려 명종 때 활약하신 류공권의 항목에 보면 "그의 6대조는 대승 류차달인데 태조를 도와서 공신이 되었다"고 나온다. 또 조선왕조실록 태종 16년에 류양(柳亮)의 전기가 나오는데 이 분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는 동안 우의정에 이른 분이다. 여기에 "그 선대에 류차달(柳車達)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공이 있었으므로, 삼한(三韓)을 통합할 때 호(號)를 '삼한 공신(三韓功臣)'이라 내렸다"고 나온다. 1565년에 완성된 "가정보"에는 고려태조가 남정(南征: 남쪽지방을 공격함)할 때 많은 수레를 내어 양식을 보급했기에 대승(大丞)이라는 관직을 내렸다고 조금 더 보충 설명이 되어 있다. 류차달은 또한 아들 류효금(孝金) 한 분만 낳으셨다.

실제로 이런 사실들 외에 류차달의 선계에 대한 이야기와 류차달 자신에 관한 사실들(처음 이름이 해(海)였다거나 자(字)나 호(號)가 있었다는 등)은 후세에 지어진 것들이라 생각된다. 또한 문화柳씨는 왕에게 사성(賜姓) 받은 적이 없으며, 대승공이 이름(차달)을 사명(賜名) 받았다는 후세의 기록 역시 잘못되었다고 생각된다.

후손들이 선조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풍습이라 시조를 "대승공"이라 부른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대승공은 신라말-고려초의 인물로서 황해도 구월산 지역에서 큰 부(富)를 지녔던 지방 호족(豪族)이었고, 그 부를 기반으로 왕건의 삼한 통일을 도울 계기가 있어 고려의 공신으로 된 분이다.

한편 공주 계룡산 동학사에는 이런 내용이 전해져온다. 곧 태조 19년(936년) 대승공께서 그곳을 갔다가 신라의 박혁거세와 박제상을 모신 곳이 황폐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동계사(東谿祠)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1956년 이런 사실에 입각해서 대승공을 그곳에 추가로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남한에서는 대승공 연고지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대승공의 사당은 광주시 광산구 본량동에 건립되어 있으며 대동사(大東祠)라 불린다.

묘는 황해도 구월산에 있으며, 류릉(柳陵)이라 불린다고 한다. 묵방재(墨坊齋)라 불리는 재실(齋室: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도 있다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3. 류차달의 선계(先系) 문제

17세기말에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원파록"이라는 문헌과 "차원부설원기"라는 문헌이 나타났다. 여기에서는 문화류씨에서 연안차씨가 갈라져 나갔으며, 문화류씨는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에서 시작하여 그의 성씨인 희(姬)씨에서부터 사([女以])씨-왕(王)씨-차(車)씨를 거쳐 문화류씨가 되었다고 주장되어 있다. 그러나 두 문헌 모두 정황적으로 그 출현에 있어 의심 가는 점이 많으며, 객관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들로 채워져 있어 믿기 어렵다. 특히 원파록의 경우 차씨들의 족보에도 그 허구성을 주장하는 글이 올라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대주의 사상과 조상 부풀리기, 그리고 윗사람의 글이라고 하면 무조건적으로 맹신하는 풍조 등이 맞물려, 급기야 심지어 우의정을 지내신 분까지도 믿는 지경에 이르렀다.

근자에 두 건의 문헌을 비평적으로 검토하여 문화류씨 선계(先系)에 대한 내용이 허구일 가능성이 밝혀지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늦게나마 거짓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이트에서는 현존하는 문화류씨의 최고의 족보이며 객관성이 높은 "가정보"와 고려사와 왕조실록 등의 정사의 기록에 근거한 검증된 내용들만을 기초로 하여 내용을 기술하고 있음을 밝힌다.

시조는 한 집안의 내력을 기록할 때 그 이상의 조상을 밝힐 수 없어 맨 위에 나타난 분이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사성(賜姓) 등으로 인해 분성(分姓)을 한 경우, 나중에 윗조상이 밝혀진 경우 등)이 아니면 시조 위의 조상이 밝혀져 있다면 모순이다. 그리고 윗조상이 밝혀진 경우는 계통을 새로 짜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다만 후손들이 인원이 많거나 중간에 가문을 중흥시킨 이가 있을 때는 파(派)를 구성하여 파조(派祖)를 세우기도 하지만 이는 시조와 엄연히 다르다.

현재 믿을 수 있는 대승공 선계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에 기록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고 기록이 후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왕건이나 이성계의 경우조차도, 설화 수준의 얘기는 많이 있지만, 실제로 믿을 수 있는 선계의 기록은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대승공 당시 이미 柳씨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신하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할 때 망설이는 그를 재촉하고 분위기를 만든 그의 부인이 바로 柳씨였다. 당시 개성 지역, 구월산 지역, 서주(아마도 현재의 서산), 전주 등지에 류씨들이 다수 살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들이 중국에서 온 성씨인지, 중국 성씨를 본떠 만든 성씨인지, 아니면 성씨의 필요에 의해 자생된 성씨인지 알 수 없다. 당시의 관향은 대개 세거(世居: 한 고장에 대대로 사는 것)한 지역을 붙이는 것이었을 따름이기 때문에 당시의 류씨들이 서로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다. 다만 문화류씨는 유주(현재 황해도 구월산 지역)에 세거하고 있던 류씨 일족들 가운데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적으로 이름을 역사에 남기신 류차달의 자손이라 보면 충분할 것이다.


4. 문화(文化)라는 곳

문화는 황해도 구월산 동남쪽의 평평한 지형에 위치한 지역의 이름이다. 서울에서 48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남도 신천군과 삼천군에 걸친 일대인데, 그 지역은 단군조선 때 당장경(唐藏京), 고구려 때 궐구현(闕口縣), 고려초에 유주(儒州) 등의 명칭변경이 있다가, 고려 고종 때 문화라는 지명으로 바뀌었고, 이후 행정 단위의 변동은 있었지만 그 이름이 계속 이어지다가 1909년 신천군으로 편입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1952년에는 삼천군이 신설되면서 절반 정도가 삼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초에 유주로서 주(州)로 승격된 것이 대승공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설득력이 있다. 류경(柳璥)은 고려 고종 45년인 1258년 무신정권을 이어가던 최의를 제거하고 왕권을 왕실에 반환하여 나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분인데, 이듬 해 나라에서는 유주를 그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바꾸고 현으로 승격시켜 보답을 표시했다. 류경은 문장에도 뛰어났기에 후에 시호도 문정(文正)으로 되었다. 유주의 儒(선비 유)자와 문화의 文(글월 문)자를 보면 그 지역이 학문으로 상당히 알려진 곳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지역이 모두 그랬다기 보다는 대승공 이하 대대로 바로 그 분들 자신이 문장이 높은 분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문화류씨를 유주류씨로 불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문화류씨대종회에서 발간하는 잡지 이름이 "유주춘추(儒州春秋)"이다.

한편 문화를 생각하면 자연히 구월산을 떠올리게 된다. 황해도는 대개 평평한 지역이다. 가장 높은 곳이 구월산으로서 953 m의 높이를 갖는다. 구월산 정상에서 동남쪽 40리에 문화현이 있었다. 구월산이 내려와 평지가 이어지는데 그곳이 문화이다.

구월산은 북한 5대 명산 중 하나이다. 풍광이 수려하며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아사달산이라고도 부르며 단군이 평양에 도읍했다가 백악(白岳)이란 곳으로 옮겼는데, 그 백악이 바로 구월산 아래라 한다. 단군이 이 산으로 돌아와서 신이 되었다고도 한다. 구월산은 민족의 신성의 대상이 되었다. 문화류씨는 뿌리가 그곳에 있기에 자연스레 구월산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구월산 남쪽 산록에 대승공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류릉(柳陵)으로 불리며 전에는 절이었다가 재실(齋室)로 변한 묵방재라는 건물이 묘소의 아래에 있다고 한다.(재실의 이름을 경사루(敬思樓)로 부르기도 하던데, 확인 요.) 묘소의 위치가 해방 전 지명으로는 황해도 초리면(草里面) 흥학동(興鶴洞)인데 지도를 살펴보니 구월산 정상 정남쪽에 688 m의 아사봉(鵝沙峰)이 있고, 그 아래에 다시 583 m의 비산(飛山)이 있고, 거기서 조금 내려오면 평지가 되는데 그 평지의 지명이 달천리이다. 달천리와 비산 중간에 흥학동이 있다. 해발 150-200 m 쯤 될 듯하다. (이 아사봉 때문에 후대사람들이 대승공의 호를 '아사'라 만들어 부른 듯하다.) 대승공은 구월산 아래 동네에 사시다가 구월산에 묻힌 것이다. 그 묘소는 대단한 명당이라 알려져 있다. (문헌과 지도만 보고 추측해 쓴 글이라 물론 실제와 다른 점도 있을 것이다.)


5. 문화류씨의 수호 동물

문화류씨 집안에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웅녀) 같은 동물과의 내력이 있다. 그건 호랑이이며, 류차달의 독자(獨子)인 효금(孝金)의 얘기에 등장한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실려 있다.

효금이 구월산에서 재(齋: 불교의 의식) 올리러 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큰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입속에 흰 물건이 가로로 걸려 있었다. 효금이 그 호랑이를 보고 "네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면 네 목에 걸린 것을 뽑아주겠다."고 말하니 호랑이는 머리를 끄떡였다. 그는 옷소매를 걷고 주먹을 호랑이 입에 넣어 뽑아내고 보니 은비녀였다.
그날 밤 효금의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 말했다. "나는 산신령이다. 어제 성당리(지명)에 가서 한 부인을 잡아먹었더니 목구멍에 물건이 걸려 심히 고통을 당하였는데 그대가 나를 구해주었다. 그 보답으로 그대의 자손이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리라."

효금이 꿈에서 깨어나 이상하게 여겨 성당리로 가보니 마을 가운데 한 집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집으로 찾아가 그 사연을 물으니 그 집 주인이 말하기를 "며칠 전에 부인(역주: '女子'라고 나오는데 비녀를 꽂았던 것을 보면 부인일 듯)이 마루에서 자다가 호랑이에게 잡혀간 지 벌써 삼일이나 지났습니다." 하였다. 효금이 그 부인이 머리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물으니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효금은 자기가 겪은 일을 자세히 말해주고 돌아왔다.

한편 다른 전승에는 꿈 부분에서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 곧, 호랑이가 은혜를 갚으려고 꿈속에서 구월산 남쪽에 대대로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하는 명당을 점지해 주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인 영락보(1423년 간행)는 현재 서문만 전하는데, 그 시작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은 "문화류씨의 후손이 번창한 것은 좌윤공(효금을 말함)이 호랑이를 살려준 것에 대한 음덕(陰德: 남이 모르게 행한 덕)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이하, 효금 혼자 덕을 쌓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대대로 적선(積善: 착한 일을 많이 함)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이어짐.]
"신증동국여지승람"보다 100여년 전의 글이다. 이것을 보면 이 얘기가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이 이야기에서 인간 이상의 신령함을 지녔다고 믿어졌던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은 내용이 나오지만, 이야기의 주안점은 효금이 목숨을 걸고 호랑이를 구해준 것이며, 또한 꿈속에서의 호랑이의 축복이 효력을 가졌다는 증거를 현실의 확인을 통해서 얻었다는 것이다.
바람을 가득 품으며 하늘을 드리운 버드나무와 형안을 번쩍 빛내며 대지를 딛고선 산중호걸의 모습, 상상하기에 참으로 멋진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참고: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유주춘추(문화류씨 종친회보)


- 2004. 12. 9.
채하 류주환 (대승공 36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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